해인총림 방장(方丈) 벽산원각(碧山源覺) 스님


[상당(上堂)하시어 주장자(拄杖子)를 세 번 치시고]

결시(結時)에 결무결(結無結)하고 해시(解時)에 역무해(亦無解)로다.
결해구분명(結解俱分明)하면 행부지행(行不知行)하고
좌부지좌(坐不知坐)하여 처처진무애(處處眞無碍)로다.
맺을 때는 맺는 것이 없이 맺고 풀 때에 푸는 것이 없음이로다.
맺고 푸는 것을 모두 분명히 하면 가도 가는 것이 없으며
앉아도 앉는 것이 없어서 곳곳에 참으로 걸림이 없도다.

영가(永嘉) 스님은 육조 스님의 법을 이었는데, 《유마경(維摩經)》을 읽다가 마음자리를 밝혔더니, 육조 스님의 제자 현책(玄策) 스님이 찾아와서 그와 함께 한바탕 법담(法談)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그의 말이 육조 스님의 뜻과 같아 현책이 묻기를, “당신의 법사가 누구인가?”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내가 《방등경론(方等經論)》은 스승이 있어서 배웠으나 뒤에 《유마경》에서 부처님의 심종(心宗)을 깨닫고는 아직 증명(證明)해준 분이 없노라” 하였다. 현책이 말하기를, “위음왕불(威音王佛) 이전에는 될 수 있으나 위음왕불 이후에는 스승이 없이 스스로 알았다는 것은 다 이 천연외도(天然外道)가 된다” 하니, “그러면 당신이 좀 나를 위하여 증명하여달라” 하였다. 현책이 말하기를, “내 말은 가볍다. 조계에 육조 대사가 계셔서 사방에서 모여 와 법을 받으니 만약 가겠다면 동행하리라” 하였다.
영가 스님이 드디어 현책 스님과 함께 와서 뵙고, 대사의 둘레를 세 번 돌고 석장(錫杖)을 떨치고 서므로 대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대저 사문(沙門)이란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을 갖춰야 되거늘, 대덕(大德)은 어디서 왔기에 이렇게 아만(我慢)이 대단한가?” 하시니,
“생사사대(生死事大)하고 무상(無常)이 신속(迅速)합니다.
나고 죽는 일이 크고 세월이 너무 빠릅니다.”
육조 스님께서,
“하불체취무생(何不體取無生)하고 요무속호(了無速乎)아.
어찌하여 무생의 본체를 깨닫지 아니하고 빠름이 없는 것을 요달하지 않는가?” 하시니,
영가 스님께서,
“체즉무생(體卽無生)이요 요본무속(了本無速)이니다.
본체는 남이 없고 요달함에 본래 빠름이 없습니다.”
“그렇다, 그렇다” 하시니,
현각 스님이 그제야 위의를 갖추고 절하고 나서 조금 있다가 하직을 고하였다.
“도리어 너무 빠르지 않느냐?” 하시니,
“본래 움직임이 아닌데 어찌 빠름이 있겠습니까?”
“누가 움직임이 아님을 아느냐?” 하시니,
“스님께서 스스로 분별(分別)을 내십니다” 하였다.
“네가 잘 ‘남이 없는 뜻(無生之意)’을 얻었구나” 하시니
“남이 없는데 어찌 뜻이 있나이까?”
“뜻이 없으면 누가 분별하는가?”
“분별하는 것이 또한 뜻이 아니옵니다.”
육조 스님께서 “착하다. 하룻밤 쉬어서 가라” 하시니, 이래서 세상에서 그를 일숙각(一宿覺)이라 하였습니다.

사자굴중무이수(獅子窟中無異獸)하고
상왕행처절호종(象王行處絶狐踪)이라.
상설소래시방춘(霜雪消來十方春)하니
만화방창조남남(萬化方暢鳥喃喃)이로구나.
사자굴 속에는 다른 짐승이 없고
코끼리 가는 곳에 여우 발길 끊어졌네.
서리와 눈 녹아 어디나 봄이 되니
날씨 좋아 만물이 생장하고 새들이 노래하네.

본지가풍(本地家風)에 있어서는 결제니 해제니 할 것이 없지만 깨닫지 못한 본분납자(本分衲子) 입장에서는 해제라 해서 자유스럽게 쉬라는 뜻이 아닙니다. 〈증도가〉에, “유강해섭산천(遊江海涉山川) 하여 심사방도위참선(尋師訪道爲參禪)이라.” 강과 바다에 노닐고 산과 개울을 건너서 스승을 찾아 도를 물음은 참선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설봉(雪峰) 스님은 당나라 때 스님으로 덕산(德山) 스님의 제자인데 12세 때 아버지를 따라 옥간사(玉澗寺)에 갔다가 그길로 출가를 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공부할 적에 피나는 정진(精進)을 하였다고 합니다. 세 번 투자산에 가고 아홉 번 동산에 갔는데, 그것은 삼도투자구지동산(三到投子九至洞山)이라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동산과 투자와의 거리가 오륙천 리나 되는 먼 길임에도 세 번이나 투자산 대동 선사와 아홉 번이나 동산의 양개 선사를 찾아가 법을 묻고 공부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리 멀고 먼 길, 험하고 높은 산일지라도 멀고 험하다고 생각지 아니하고 오직 도를 위하여 몸을 아끼지 않고 부지런히 공부했다는 것입니다.
설봉 스님은 암두(巖頭) 스님, 흠산(欽山) 스님과 함께 세 분이 도반이 되어 다니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설봉 스님은 어디를 가든지 공양주만 하여서 쌀 이는 조리를 늘 가지고 다녔고, 암두 스님은 어디를 가나 채소밭을 가꾸는 원두(園頭) 소임을 맡아 괭이와 호미를 늘 가지고 다녔으며, 흠산 스님은 어디를 가나 바느질만 해서 실뭉치와 바늘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셋이서 어느 처소에 가든지 설봉 스님은 공양주를 맡아 대중의 공양을 지어 올리고, 암두 스님은 채소를 가꾸어 대중의 반찬을 해 올리고, 흠산 스님은 온 대중의 바느질이란 바느질은 전부 도맡아 해주었습니다. 이렇게 셋이 도반이 되어 다니면서 공부를 하여 마침내 세 분이 다 공부를 성취하여 후세에 모범적인 대도인(大道人)들이 되었습니다.
선종사에 있어서 최초로 대중을 많이 거느린 스님이 설봉 스님인데, 항상 1천5백 명 이상의 대중을 거느리고 살았다고 합니다. 설봉 스님께서 1천5백 명 대중보고 하시는 말씀이, “너희 1천5백 명 대중이 모두 나의 이 조리 속에 나왔다” 고 하였습니다. 결국 무슨 뜻이냐 하면 복혜쌍수(福慧雙修)를 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복도 짓고 공부도 해야 원만한 법(法)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선사(先師) 스님들께서는 어떻게 공부를 했는지 살피고 우리가 어떻게 해야 바르게 공부가 될지 반성(反省)해야 될 일입니다.

수미정상무근초(須彌頂上無根草)는
불수춘풍화자개(不受春風花自開)로다.
수미산 꼭대기 뿌리 없는 풀은
봄바람이 아니라도 활짝 피었네.

[주장자를 한 번 치시고 하좌(下座)하시다]

을미년 동안거 해제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