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시 명칭 : 해인사 희랑조사상 ‘진품’ ‘복원품’ 동시 공개 전시회
*. 전시 기간 : 2010년 10월2일~10월 31일
*. 전시 장소 : 구광루
*. 주최 및 주관 : 법보종찰 해인사

1. 전시회 개최 연유와 목적

해인사 소장 보물 제999호 희랑 조사상은 오랜 시간이 경과하는 동안 환경적 훼손<박리. 박락. 균열>과, 인위적 훼손<촛농, 긁힘, 라벨지>으로 변화되고 손상되어 2008년 9월부터 2009년 2월까지 문화재청 도움으로 보존처리를 실시하였는데 유물 상태를 고려하여 최소한의 보존 처리로 마무리 지었습니다.

보존처리 이후 더 나은 보존 환경을 유지하기 위하여 상설 전시나 원거리 이동은 자제해야 할 것으로 판단되어 그 동안 전시를 하지 않았으며 대여 요구에도 일체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해인사를 방문하는 방문객들이 팔만대장경 다음으로 희랑조사상의 관람을 중요시하고 전시. 관람을 계속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해인사에서는 희랑 조사상 ‘진품’의 더욱 안정된 보존 관리를 위하여 전시, 참배용 ‘복원품’ 희랑 조사상을 조성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법보종찰해인사(주지 회암 선각)에서는 2010년 해인사 개산대재에 맞추어 진품과 복원품의 동시 공개 전시회를 가져 진품에 대한 일반인들의 마지막 관람기회를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진품’은 보존 관리상 안전한 진열장을 마련하여 진열장 유리창을 통해서 관람하도록 하며, ‘복원품’은 좌대에 올려 노출시켜 관람 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또한 전시기간 중 ‘복원’된 희랑조사상의 복장을 위하여 복장 모연을 행사를 진행합니다.
조사상의 복장 모연은 불자들에게는 신앙적인 의미로,
비불자들에게는 자신의 희망을 심는 타임캡술의 의미로 동참이 이루어지도록 할 것입니다.

복장은 다라니(전신사리보협진언) 종이에 자신의 이름과 소원을 적어  ‘복원’ 희랑조사상 몸속에 넣는 것으로 불교신앙으로 본다면 업장이 소멸되어 성불과 극락왕생의 인연을 심는 일이요, 문화적으로 이해한다면 동시대를 살아온 공동체의 다양한 희망의 타임캡술이 될 것이니 복장 모연 행사도 이번 전시회의 중요한 신앙 또는 문화 행사로 승화 될 수 있도록 잘 진행하고자 합니다.

전시 후 ‘진품’ 희랑 조사상은 해인사 박물관 수장고 내 특수 제작된 희랑조사상 나무함 속에 안전하게 보존 할 것이며, ‘복원’된 희랑 조사상은 모연 접수된 복장물로 복장을 한 후 일정기간 큰절에서 참배 후 박물관으로 옮겨 상설 전시실에서 참배, 관람 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2. 해인사의 중창주이자, 해인사 제3대 조사로 추앙받는 희랑 대사는 누구인가?

희랑 스님은 신라 진성여왕 3년 을유乙酉(889)에 거창군 주상면 성기聖基마을에서 출생하였으며, 속성俗姓은 주씨朱氏이고, 15세에 해인사로 출가하여 나이 78세 때인 고려광종(7년) 966년 병인년에 입적하신 분이다. (* 한찬석, 합천해인사지. 거창군사편찬위원회 자료>

스님이 태어난 시기는 신라의 하대下代(780~935)에 속하며, 이 시대는 궁예와 견훤을 비롯하여 수없이 일어난 반란으로 통일 신라는 정치적·군사적 통제를 잃고 국가적인 혼돈과 무질서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스님이 출가한 해인사는 802년 순응順應 · 이정利貞 스님의 창건이레 이들 스님의 뒤를 이은 결언決言 스님과 현준賢俊 스님(최치원의 친형)의 활약으로 신라 왕실과 밀접히 교류하면서  신라말 화엄종의 중심도량으로 면모를 굳건히 하고 있었다.

신라 말과 고려 초의 두 왕조에 걸쳐 생존했던 희랑대사에 대해 명확하게 알려주는 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희랑대사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나타나는 고려 화엄불교의 대가 균여(917~973)대사의 <균여전> 기록에

“스님은 북악의 법손이다. 옛날 신라 말 가야산 해인사에 두 분의 화엄대가가 계셨다. 한분은 관혜공인데 백제 견훤의 복전이 되었고, 한분은 희랑공인데 태조 왕건의 복전이 되었다. 이 두 사람은 초심 때는 향화를 올리며 서원을 맺었으나 어른이 되어 서원이 이미 달라졌으니 어찌 주장이 같겠는가! 문도들에게 내려가면서 점차 물과 불처럼 되었다. 더구나 법의 맛을 각기 다르게 받았으니 그 폐단을 없애기 어렵게 된 것이 오래였다. 그 때 세상 사람들은 관혜공의 법문을 일컬어 남악이라 하고, 희랑공의 법문을 북악이라 일컬었다....”  

‘가야산 해인사 고적’ 사료에
“ ......신라의 말기에 승통 희랑 스님이 해인사 주지로 계시면서 ‘화엄신중삼매華嚴神衆三昧’를 얻었을 적에, 고려 태조 왕건이 백제의 왕자 월광月光(?)으로 더불어 싸웠는데, 월광은 미숭산에 있으면서 식량이 넉넉하고 군병이 강하여, 왕건의 힘으로는 대적할 수가 없었다. 이에 왕건은 해인사에 들어와서 희랑공을 스승으로 섬기면서 백제를 물리칠 방법을 청하자, 희랑공이 ‘용적대군야차왕勇敵大軍夜叉王’을 보내어 돕게 하였다. 백제 월광이 금갑金甲을 입은 신병神兵이 공중에 가득함을 보고 두려워 항복하였다. 그래서 태조는 희랑 스님을 공경하여 받들면서 전지田地 오백결五百結을 드리니 스님은 옛 사우寺宇를 새로 중건하였다. …”

지리적으로 해인사는 후백제에서 신라에 이르는 중간지역에 위치하고 있어서 군사적 전략의 요충지대에 놓여 있었고, 해인사와 멀지 않은 팔공산에서 견훤과의 일대전투를 벌인 왕건은 휘하의 신숭겸申崇謙과 김락金樂 등 많은 장수들을 잃고 패배하였으며 자신도 겨우 사지死地에서 탈출하는 곤욕을 치르게 된다. 목숨이 위급한 것은 물론 자신의 오른팔과도 같았던 심복인 신숭겸과 장수들을 잃은 정신적인 허탈감을 떨칠 수 없었던 왕건은 희랑스님에게 귀의하여 용기와 각오를 돈독하게 다지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화엄학에 있어 북악파의 대표였던 희랑스님은 왕건의 존사尊師와 복전이 되어 고려 건국을 돕게 되었고, 국가적인 신임과 후원을 받아 해인사를 크게 중창하고 화엄학을 크게 융성케 하였으며 이적異蹟을 많이 남기신 고승이었다.

또한 그 당시에 희랑스님이 큰 명성을 대변하는 최치원의 시
‘증희랑화상贈希朗和尙’ 6편이 남아 있는데

<제1편>에
보득금강지상설步得金剛地上說 금강 같은 참다운 지혜의 말씀 모아
부살철위산간결扶薩鐵圍山間結 미륵보살이 철위산에서 대승경을 결집했네
필추해인사강경苾蒭海印寺講經 필추가 해인사에서 경전을 강하니
잡화종차성삼절雜花從此成三絶 잡화가 이로부터 삼절을 이루리. (이하 5편은 생략)

이 시에서 최치원은 희랑 대사를 용수보살이나 문수보살에 비겼는가 하면, 하늘이 우리나라를 교화 시키려 보냈다거나, 부처님으로까지 비견하고 있다. 또한 해인사에 화엄경을 강의하여 화엄종을 크게 떨쳤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주목된다. 최치원이 해인사에 머문 때는 아마도 900년경 이후 이었을 것이므로  희랑대사는 이 당시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어서 10세기 중에는 북악파의 조사로 추대되었을 것이며 아울러 해인사 개산조 순응. 이정 조사의 제1.2대 조사에 이어 해인사의 제3대 조사로 추앙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탁기兪拓基의 <유가야기游伽倻記>에는
희랑 스님과의 인연으로 불교에 귀의한 태조 왕건은 광종에게 내린 훈요십조訓要十條의 첫머리에 ‘우리나라의 대업은 반드시 모든 부처님의 보호와 지켜 주심에 힘입은 것이다(일왈아국가대업一曰我國家大業 필자제불호위지력必資諸佛護衛之力)’라고 천명하면서 불교에 대한 귀의와 신봉을 후대에 부촉하였으며, 희랑 스님이 입적한 후에 광종은 즉위년(949년 기유 오월)에 희랑 스님에게 ‘해인존사원융무애부동상적연기상유조양시조대지존자海印尊師圓融無碍不動常寂緣起相由照揚始祖大智尊者’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는데, 여기에는 해인사로 출가하여 거주하면서 신라말에는 승통으로 주지하였으며, 고려초에는 왕의 존사로서 건국에 일조하였고, 화엄과 선을 원만하게 포융하면서도 화엄종의 중심인물로 화엄종찰인 해인사를 중창하였고, 고려시대에 불교가 국가적인 숭상과 후원을 받아 제세濟世의 역할을 다하도록 하여 화엄의 사상을 빛낸 조사라는 희랑스님의 업적을 담고 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3. 조사상의 백미로 일컬어지는 해인사 희랑 조사상(예술성 작품성)은 어떤 것인가?

희랑 조사상(좌고 82㎝. 1989년 4월 10일에 보물 제999호로 지정)은 희랑 스님의 생전 모습을 그대로 제작한 조각상이다.

희랑스님이 살아생전에 스님이 직접 조성하였다는 설과 열반 직후 후학들이 조성하였다는 설이 있는데, 나이든 고승의 모습을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을 감안한다면 이 조각은 스님이 입적하기 얼마 전이나, 열반 직후에 조성되어진 것으로 진영 조각의 진수를 가장 잘 묘사함으로써 10세기 중엽 고승의 造像조상 가운데 최고의 걸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최근 희랑대사상 보수 보존처리 작업을 하는 과정 중에 희랑조사상의 내부구조를 투시하기 위하여 X-ray를 촬영한 결과 지금까지 목조상으로 알려진 것과 다르게 목재심에 옻칠이나 직물 지류를 사용하여 조형된 목심 건칠상으로 밝혀짐으로 인해 한국에서 유일한 목심 건칠상이자 가장 이른 시기의 불교공예 가운데 최고의 작품으로 현재 국보로 승격 신청 중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나라의 유일한 승려의 목심 건칠진영 상이라는 점에서도 미술사적 가치가 큰 작품으로 중국 요遼대에 제작되었다고 전해지는 일련의 건칠 승려상과의 비교 검토가 요구되는 뛰어난 상像으로 조성 양식은 신라말기에 유행했던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표현하였으며, 이상적 사실주의가 아닌 현실적인 즉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하여 초상기법이나 불상양식 연구 등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는 祖師像조사상의 백미이다.

상像은 체구에 비해 머리가 다소 큰 편이다. 얼굴은 길고 이마에는 주름살이 깊이 파였으며, 자비로운 눈매, 우뚝 선 콧날, 잔잔한 입가의 미소는 조사 스님의 살아있는 듯한 인자한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여윈 몸에는 흰 바탕에 붉은 색과 녹색의 둥근 점이 있는 장삼을 입고 그 위에 붉은 바탕에 녹색 띠가 있는 가사를 걸치고 있는데 그 밑에 금색이 드러나는 것으로 미루어 원래 모습에는 금빛이 찬연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양손은 단정히 맞잡고 가만히 앉아 정면을 응시하는 정적인 모습과 인자하면서도 굳은 의지마저 느껴지는 긴 얼굴에는 희랑스님의 깊은 학식과 경륜이 함축되어 있는 듯하다.

일반적으로 초상화가 그러하듯 마치 정확한 의학적 지식에 기초한 듯 골격과 근육의 구조를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한 점이 특징이다.

생략할 곳은 과감히 생략하고 강조할 곳은 대담하게 강조하여 스님의 범상하지 않은 위용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목심에 베나 지류를 붙여서 조성하였기에 매우 섬세하고 생동감이 넘치고 인간적인 따뜻한 정감도 느낄 수 있다.

그리하여 희랑 조사상은 스님의 내면적인 정신성까지 조형화한 사실적 표현에서 한국적인 초상 조성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특이한 것은 희랑 대사의 가슴 한가운데 조그마한 구멍이 뚫어져 있는데 사전寺傳에는 흉혈국인胸穴國人이라는 구전과
그리고 이 구멍은 여름에 모기가 극성을 부려 스님들이 수행에 지장을 받자 희랑스님이 가슴에 구멍을 내어 모기들에게 피를 ‘보시’하여 해인사의 모든 모기가 자신에게 모여들었고 다른 스님들이 편안히 정진할 수 있게 하였다는 구전과,
또한 화엄 삼매에서 방광放光을 한 자취라는 구전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처럼 화엄종의 대종장이며, 해인사 중창의 대공덕주이자 고려 태조의 복전으로서 명성을 높인 희랑스님께서는 현재 해인사 산내 암자 희랑대 독성전 옆의 바위에서 좌선삼매 수행하셨다고 구전되는데 희랑대는 나반존자를 모시고 수행하는 영험있는 기도처이다.

*. ‘복원’ 희랑 조사상은 2009년 초부터 시작하여 1년 반의 기간으로 조성되었는데
조각은 김원철 彫刻匠 . 채색은 정경문 丹靑匠이 맡았으며 (*아래 참조)
복원 경비는 해인사 희랑대 감원 경성스님 조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