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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박물관 조원영


지난 6월 문재인 대통령이 가야사의 연구와 복원을 국정과제에 포함시킬 것을 지시한 이후, 우리 합천군에서는 국정과제의 성격을 제대로 분석하여 우리 지역의 가야유적에 대한 발굴조사 방안을 수립하고 복원 방향을 설정하여 경상남도와 함께 가야사 연구에 집중적인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


그 계획의 일환으로 가야의 대표유적인 옥전고분군, 삼가고분군과 성산토성에 대한 계속적인 조사 및 사적 지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지역에서 오랫동안 논의가 되어오던 대야성의 위치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그간의 발굴조사 성과를 토대로 실제 위치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쌍책면에 위치한 성산토성은 그 동안 세간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던 유적이었다. 그런데 최근 3차례의 발굴조사를 실시하면서 가야시대 다라국의 도성이라는 학설이 유력하게 대두되었다. 최근 한 언론사에서 성산토성이 대야성이 아닐까 라는 의견이 새롭게 제기되었다.


성산토성에 관한 문헌자료는 전혀 남아있지 않으며, 발굴 조사 결과 성벽의 축조 형태와 성벽에서 발견된 토기 조각 등의 유물을 통해서 가야시대 다라국의 옛 성터일 가능성을 추정하고 있을 뿐, 이 성이 신라의 대야성이라는 증거는 전혀 확인할 수 없다.


이 성이 신라 선덕여왕 당시의 대야성이라면 성곽 축조 형태를 차치하고서라도 신라 당시의 건물터나 유물이 확인되어야 하는데, 현재까지의 조사 결과로는 유구와 유물 모두 가야와 관련된 것으로 확인되어 대야성 전투와 관련한 성으로는 보기 어렵다.


대야성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선덕여왕조와 백제본기 의자왕조, 김유신 열전, 죽죽 열전에 대야성 전투로 확인된다. 그리고 같은 책 지리지 강양군조에 보면 “강양군은 원래 대량주군(대야주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합주(합천)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대야성이 합천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대동지지(大東地志)』, 『경상남도 여지집성(輿地集成)』, 『합천군 읍지』, 『교남지(嶠南志)』에도 모두 “합천은 본래 대량주군으로 량(良)은 야(耶) 또는 야(野)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각종 지리지가 편찬될 당시 합천은 합천군, 초계군, 삼가현으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대량주’에 대한 내용을 합천군조에 기록하고 있어 당시 사람들은 합천군에 대야성이 있었다고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경상남도 기념물 제133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야성터는 2차례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조사를 통해 살펴보면 이 성은 원래 존재했던 가야시대의 성을 신라가 이 지역을 장악하면서 확대, 개축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므로 이 성은 가야 당시에 이 지역을 장악했던 다라국 세력이 5세기 무렵 처음 세웠던 것으로 추정되며, 합천읍 일대를 중심으로 황강 중류지역을 통제하며 낙동강, 남강지역을 아우르는 대가야 연맹체의 주요 군사적 거점의 기능을 한 것으로 파악된다.


즉 경남 서북부 일대에서 남해안에 이르는 주요 교통로의 연결지점에 위치하여 이곳에서 황강을 통해 낙동강과 남강으로 이어진 수운을 이용하여 왜나 중국과 교류할 수 있으며 남쪽의 삼가지역과 의령지역을 대가야연맹체의 영향력 아래 둘 수 있는 지리적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565년 이 지역이 신라에 완전히 병합된 후 신라는 백제를 방어하는 전진 기지로서 이 지역을 주목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근거를 통해 문헌기록과 고고학적 자료를 종합하여 검토해 보면 642년 선덕여왕 당시 대야성 전투가 있었던 역사적 현장은 바로 현재 합천읍에 남아 있는 대야성터로 볼 수 있다.